[32]소수의견 백광엽 논설위원/한국경제/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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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5. 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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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태아였다."
조용호.이종석 두 헌법재판관이 지난주 낙태죄 위헌 심판에서 낸 소수의견이다. "우리가 위헌.합헌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합헌의 변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적지 않았을 듯싶다.
헌법재판관 9명 중 7명이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단했지만, 6년 전만 해도 합헌이었기 때문에 논란은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앞서 간통죄,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줄줄이 뒤집어졌다는 점에서, 세상 변하는 속도에 살짝 현기증이 날 정도다. 한편으로 법관들마저 혹시 유행을 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소수파와 소수의견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이 '마이너리티'에서 나올 때가 많다. 17세기 초 케플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동설이 소수의견이었던 것처럼, 모든 진리의 출발은 소수학설이다.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의 약 70%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는게 정신병리학계의 설명이기도 하다.
일류 중에 소수파를 자처하는 이도 허다하다.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도 그런 사람이다. 일본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독학한 이력에서부터 소수파의 향기가 전해진다. 그는 "다수는 시끄러울 정도로 네거리를 활보한다"며 "사일런트 머저리티(침묵하는 다수)라는 개념은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일런트 마이너리티(조용한 소수)>라는 기발한 제목의 역사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소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한 사회의 건강성의 바로미터다. 소수를 배제하지 않고, 소수의견이 빈번하게 도출되며, 주류가 귀 기울이는 조직이라야 희망을 말할 수 있다.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요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뒤집어 보면 소수를 억압하는 제도인 만큼 신중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과반에 속할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소수가 돼서야 민주주의에 차별이 넘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법이다. 민주주의 종주국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다른 정부 형태들을 제외한다면 최악의 제도"라고 한 이유다.
"한 사람의 바보는 한 바보, 두 사람의 바보는 두 바보, 만 사람의 바보는 역사적인 힘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좋아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레오 롱가네지의 말이다. '우리는 모두 태아'였으며 '진리는 모두 소수'였다.
- 요약 및 의견
최근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9명 중 7명이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단하며 낙태가 허용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전에 간통죄와 양심적 병역거부에서도 법원의 판결이 뒤집혔다는 점에서 너무 빠른 변화에 위원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소수의견에서 나온다고 한다. 케플러의 지동설과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대표적이다.
위원의 말대로 소수는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에서는 소수의견이 묵살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가 최악의 정부 형태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지는 않은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소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함을 보여준다고 한다.
위원은 위 사설에서 낙태죄가 위헌으로 뒤집어진 점에 대해 상당히 불편함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낙태 허용이라는 소수의견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다수에게서 존중받아 위헌 결정이 된 건 아닐까. 낙태허용이 옳다 그르다하기는 어렵고, 보는 관점과 그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낙태죄는 인권이 달린 문제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예시로 든 케플러의 지동설 이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 또한 억압받던 소수의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거듭나게 되었다.
낙태는 태아의 인권과 부모의 인권 중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조용호, 이종석 헌법재판관이 "우리가 위헌, 합헌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낙태 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또 부모의 입장에서 원치않는 임신이나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면 남은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일이 없도록 하는게 맞다.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게 생각한대로만 되지 않지 않는가. 상황이 급변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가 행복할까. 잘 모르겠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이전에 법적으로 안되던 것들이 허용되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다수의견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일수록 더욱 이 점을 명심하며 소수의견을 보호하고 존중해주는 시민의식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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